초등학교의 추억 소산/문 재학
초등학교.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라 조금은 오래 되었지만, 기억을 더듬어 두서없이 적어 본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 아버님 손에 이끌려 십리길이나 되는 초등학교에 무명으로 짖은 바지저고리(한복)를 입고 입학 했다. 그 당시는 거의 대부분 학생들이 바지저고리를 입었다.
필자의 부락에서 개천을 따라 800여m 되는 堤防 뚝길을 나서면 자갈도로인 신작로다.(그때는 새로 만든 길이라는 뜻으로 어른들이 그렇게 불렀다. 현재는 국도 24호선임)
이어 길이 약 350m, 높이 30~50m의 경관이 수려한 “개벼리”라는 절벽이 나온다. 개(犬)가 길을 처음 찾아냈다는 전설이 있다. 큰 개벼리와 작은 개벼리로 구분되고, 황강(육감으로는 영국의 뎀즈. 프랑스의 세느강보다 강폭이 넓은 황강이 합천군 중심. 8개 읍면을 흐르고, 은어와 민물뱀장어가 바켙츠로 잡을 정도로 많이 서식 하였는데, 지금은 낙동강 오염으로 완전히 사라져 한 마리도 구경을 할 수 없다. 이 낙동강물이 부산을 비롯한 경남 남부의 여러개 도시의 상수원이다)물이 부딪치는 곳이라 수심이 깊어 시퍼런 소(沼)가 여러 곳에 있었다. 소(沼)가 있는 곳은 다리가 후들거려서 강가로 나가지를 못했다.
이곳 개벼리는 이순신 장군의 亂中日記중 白衣從軍로 記錄에 “천길 낭떨어지를 지나---”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크고 험한 절벽이다.
이 절벽 중간으로 도로가 나있는데, 도로 아래 황강. 쪽으로는 5~10m의 절벽이고, 도로 위로는 수십미터 절벽이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위로는 돌이 떨어질 가봐, 아래로는 차가 지나갈 때 강가로는 좁은 도로라 피하기가 두려워 항시 뛰어다녔다.(지금은 강변 따라 긴 다리를 놓아 이용하고 있음) 소풍 갔다가 늦게 오면 어둠속에 외아들 마중 나온 친구 어머니의 아들 부르는 소리가 메아리 되어 울려 퍼지던 절벽이다. (이개벼리의 傳來風俗 하나로 큰개벼리 한 모퉁이의 넓은 도로 경관이 좋은 곳에 해마다 추석 다음날이면 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모였다. 이날은 시집살이 하는 딸이 모처럼 친정 부모 만나고, 처녀총각 선보는 날이라 칭할 정도로 “만남의 날” 행사가 있었다. 세월 따라 지금은 없어졌지만 추억이 새롭다. 그리고 가을이면 단풍이 너무 아름다운 곳이다.)
6.25戰爭 중이라 이곳을 지날 때, 어떤 때는 군인들이 대오를 정비하여 지나가며 부르는 軍歌가 개벼리 절벽이 쩌렁쩌렁 울리는 것이 씩씩하고 너무 좋아 학교 반대방향으로 잠시 같이 걸어본 기억도 난다.
절벽의 도로 아래 강변에 공간이 있는 곳에는 여러 종류의 크다란 포탄이 이리저리 많이 흩어져 있었다, 부모님들이 손을 대지 못하게 하여 옆에 가지도 않았지만, 저절로 터질 것만 같은 두려움도 있었다.
또 도로 側溝에는 기관총 실탄을 비롯한 각종 실탄이 많이 흩어져 있었고, 낙엽 속을 헤치면 포탄 화약봉지도 실탄과 함께 여러 봉지 같이 나왔다. 이 화약 (그 당시는 이 화약의 용도를 몰랐지만)봉지는 기름종이에 길이 30cm 정도. 가는 엿가락처럼 노랗게 생긴 것을 수백 개씩 포장을 하였는데 보기가 좋아 가지고 놀고 싶을 정도였다.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선배들이 도로위에 불을 붙여 놓으면 고약한 화약 냄새를 풍기면서 이리저리 픽픽 소리를 내며 튀는 것이 재미가 있어 숨겨두고 하교 길에 수차례 같이 해보기도 했다.
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검은 콜탈로 칠한 판자벽 교실 입구, 모서리 벽면에 쏘련 국기의 망치와 낫 그림아래 스타린 초상을 그린 크다란 걸개그림이 무섭게 한동안 걸려 있었던 것도 인상에 남는다.
나누어주는 교과서는 표지가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회색의 뚜껍고 규격이 작아 볼품없이 조잡했다. (지금은 “산수”책을 그 당시는 “셈본”아라 불렸던 것으로 기억하고 그 후 산수책으로 이름이 바뀌니 한동안은 어색 했다.) 처음 보는 책이라 원래 책은 그런 것인가 생각했다. 졸업 무렵에는 종이 질이 다소 좋아진 것 같았다.
공책은 돈이 없어 한권에 여러 과목을 함께 정리 하였고, 연필도 예비용도 없이 한 자루뿐 이였다. 물론 지우개도 없었다. 틀린 글자를 지우려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지우다보니 공책에 자주 구멍을 내어 지저분하고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겨울이면 난로용 땔감이 부족하면 인근 산에 가서 솔방울과 소나무껍질 등을 주워와 난로를 피웠다. 대부분 임산연료를 사용하던 때라 그것도 흔치 않았다. 교실과 복도 나무로 된 마루 바닥은 초칠을 하여 항상 반들반들하고 미끄러울 정도로 시간만 나면 문질렀다.
그 당시 학교에서 분유배급을 했다. 종이 드럼통(가축 사료용 우유 로 무상 원조로 들어온 것 같음)에 담긴 분유를 조금씩 나누어 주는데, 집에 가져 와서 먹는 법을 모르니 쩌서 (우유 떡?) 먹는데, 돌처럼 딱딱해서 먹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그것을 먹으면 배가 아파 먹지를 못했다. 분유가루 같은 기름진 음식을 먹어본 경험이 없는 위(胃)가 받아 주지를 못해서 일 것이다. (※ 지금은 흔한 돼지고기도 그때는 잔치나 시사 때가 아니면 평소에는 먹을 수 없는 귀한 음식이기에 모처럼 먹으면 두드러기가 일어나 먹지를 못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군(軍)에 입대하여 먹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지만, 먹을 것이 귀한 시절 영양실조 상태일 텐데도 영양이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 체질이 원망스러울 뿐임)
그래서 분유배급을 하면 분유대신에 종이드럼통내 분유 변질을 막기 위한 투명비닐이 신기하여 그 비닐을 분유대신에 가져 오는 철없는 짓도 하였다. 얼마 후는 분유배급을 중단하고 학교에서 우유를 끓여 한 그릇씩 주는데, 필자는 그 우유를 처다 보지도 않았다. 잘 먹는 친구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하교 길 검게 물들인 무명천의 책 보따리에 책과 공책 그리고 깡통으로 만든 필통(안에는 연필 한 자루 뿐임)을 둘둘 말아 어께에 대각선으로 매고 교문을 나서면서부터 십 여리 길을 쉬지 않고 집으로 달리면 깡통필통 안 연필이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그때만 해도 연필 질이 좋지 않아 연필을 칼로 깍을때, 조심스럽게 하지 않으면 연필심이 잘 부러지던 시절인데. 필통 안에서 엄청 흔들었으니 온전할 리가 없었다. 따라서 이래저래 항상 몽당연필이다. 손에 잡기 힘들면 대롱에 끼워서 사용했다.
그때는 겨울이면 날이 얼마나 추운지 강물이 해마다 얼었다. (지금은 아무리 춥다 해도 강물에 얼음덩이 떠내려가는 것을 보지 못한다.) 강 얼음위로 나무 짐을 지개와 함께 밀고 다닐 정도로 꽁꽁 얼었다.
겨울에 학교 갈때는 솜을 넣은 바지저고리에 무명革帶를 매는데, 장갑도 없이 언 손으로 그 매듭을 풀기가 쉽지 않아 고생하던 일이 어제일 같이 생생하다. 그리고 날씨가 하도 추우니까 선배들의 꼬임도 있었지만, 지독히 추운 응달인 개벼리 절벽 아래를 통과하기 싫어 학교를 가지 않고 논두렁에 불을 놓으면서, 학교를 마치고 오는 학생들을 기다릴 때는,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지루한지 학교 가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워했던 기억도 난다.
집에 도착하면 등잔불(접시에 피마자 기름등을 붓고 솜으로 심지를 만들어 불을 밝힘) 에 공부를 해야 하니 숙제가 없는 한 아예 공부는 하지 않고 친구들과 노는 데만 열중했다. 그 후 석유를 이용하는 호롱불로 바뀌어도 여전히 공부는 하지 않은 것 같다.
오래된 과거지만 궁핍하고 어려웠던 시절, 한번 되돌아보았다. 모든 것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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