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회담반대 데모이야기 소산/문 재학
지금 생각하면조금은 無謀한 일이지만, 60년대 중반 4.19혁명이후 첫 데모로 한일국교 정상화 반대 데모를 했다.
일제 36년간 온갖 수모와 핍박을 받은 놈들과 국교정상화를 하는 것은 굴욕적인 외교다. 이렇게 앞세운 명분이 그 당시 학생들에게는 그럴듯하게 먹혀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아주 격렬한 데모였다.
물론 필자는 데모 명분보다는 젊은 혈기와 친구들 권유, 그리고 호기심과 群衆心理 때문에 참석 했다. 다닌 학교가 성동구 모진동이라 시내를 들어가려면 한양대학과 서울교대(사범고등학교에서 초급대학으로 바뀐지 얼마 안됨 = 지금은 강남으로 옮겼지만)앞 마주보는 사이도로를 지나 행당교를 거처 을지로로 향해야 했다.
을지로 도로변에 몇 곳에 공사용 자갈(지금은 자갈대신 석산에서 나온 쇄석으로 레미콘으로 편리하게 쓰지만, 그 때는 레미콘 이름조차 몰랐다. 자갈은 굵기가 밤톨만 한 것부터 계란크기정도 까지 하천에서 채취한 자갈 로 모래와 섞어 세멘트 공사를 함)을 차량으로 야적에 놓은 것을 학생들이 몇 개씩 손에 쥐니 순식간에 큰 자갈 무더기가 사라졌다. 자갈이 없는 학생은 보도 불럭을 깨뜨려 소지했다.
을지로에서 다시 동대문으로, 종로를 거처 세종로를 지나가는데, 땡땡하는 전차도. 버스도 모두 올스톱 시켜 대로를 占領(?) 하여 몰려갔다. 그 당시 대다수 국민은 한일회담 반대에 동조 하였기에, 도로변 시민들 박수 속에 意氣揚揚(?)하게 아무런 저항 없이 청와대로 갔다. 물론 자갈은 필요가 없었다.
경북궁 옆 청와대 입구 효자동 진명여고 앞 도로에서 일부의 서울대생과 한국외국어 대학 학생들과 합류했다. 도로를 추럭이 가로 막고 있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박정희 나와서 한일회담 취소 약속하라”는 구호를 외치기를 수 시간 지나서야 회담대표 김종필 국무총리가 아닌 당시 내무부장관 엄민영씨가 나와 우리학교 총학생화장간에 차(추럭)위에서 대화가 이루어졌으나 시원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그리고 해산 했다.
두 번째 참여하는 날은 역시 같은 코스로 세종로 시민회관 (지금은 새로 지어 세종회관임) 앞에 각대학교 학생들이 수천 명이 모였다.
세종로에 바리게이트가 겹겹이처 대비하고 있었다. 1차는 비무장 경관이 3줄 겹으로, 10m 뒤에는 방석모 등으로 무장한 경찰이 역시 3겹으로, 또 그 뒤쪽 10m에는 통나무를 ×모양으로 걸친 곳에 철망을 감아 바리게이트를 쳐두었고, 경북궁 앞에는 군인 추럭이 태평로 쪽을 향해 밀착하여 막고 있었다.
1차 저지선은 쉽게 뚫리고, 2차 저지선도 무장경찰과 직접 마찰을 서로 피하기 위해 옆으로 빠져도 수많은 학생들의 밀어붙이는 힘에 의해 밀고 당기는 사이 곤봉사용이 이루어지자 성난 학생들이 곤봉을 빼았어면서 어렵지 않게 뚫였다.
3차 저지선은 바리게이트에 다칠 위험이 있어 자제하는 사이 학생들이 경찰 순찰차를 빼앗아 철망 바리게이트를 무너뜨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최루까스 차가 도로 양쪽에서 시위대를 뿜어대니 최루탄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고통이 심해 추럭까지 접근도 못 한체 전부 散之四方으로 흩어졌다.
최루까스에는 방독면을 쓰지 않는 한 예외가 없었다. 지나가는 시민들 풍채가 좋은 점잖은 분이나 아름다운 아가씨 등 남녀노소 모두 눈이 붉게 충혈 되면서 눈물을 흘렸다. 필자도 잠시도 견딜 수 없어 경기도청(그 뒤 수원으로 옮김)옆으로 해서 안국동으로 피해 돌아왔다.
데모 3일째는 한양 대학 앞 행당대교를 학생들이 가득 메워 지나갈 때 헬기가 공중을 선회하면서 해산하라는 宣撫방송을 했다. 물론 귀 기울이는 사람 없었다.
다리 끝에는 경찰이 막아서고 있으면서 학생과 대치 하다가 검거작전에 흩어지는데, 몇 사람은 피할 곳이 마땅치 않아 청계천 판자촌 루핑(루핑이란, 지금은 볼 수 없고, 용어조차 생소 하겠지만, 섬유 천에 아스팔트를 뭍혀 검게 만든 것으로 판자 등 지붕에 덮어 사용하는데, 여름에는 냄새도 나고 엄청나게 덥다. 그래도 다른 대책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사용함. 행당동에서 동대문까지 복개 안된 악취나는 청계천변 양안에 루핑 판자 집이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지붕위로 여럿이 피하다 보니 루핑아래 받침이 약한 곳은 체중 때문에 구멍이 뚫리는데 경찰도 그 광경을 보고는 추격을 포기 했다. 어렵게 사시는 분들에게 대단히 죄송했다.
다음날 6월 3일은 소위 말하는 63위수령이 서울전역에 내려져 서울시내는 군인이 쫙 깔리면서 2인 이상은 무조건 연행을 했다. 낚시 가는 사람조차 따로따로 가야했다.
그 당시 기숙사 생활을 하였는데, 학교에는 경찰이 오지 않았다. 45여 년 전의 일로 아련한 추억으로 떠올라 한일회담 반대데모 이야기를 그 당시 사회상을 상기하며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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