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수필

공직 생활을 마감하고

소산1 2009. 10. 31. 18:45

公職 生活을 마감하고

 

소(小)산(山)/ 文 載學

40년 가까운 公職生活을 마감한지도 벌써 1년 반이 되어 간다.

변변치 못한 공직 생활이지만, 지나간 歲月을 뒤돌아보고, 사회의 初年생으로서 猥濫되지만 所懷를 밝혀 보고 싶다.

 

어른들의 이야기가 “華麗하고 즐거웠던 시절은 생각이 잘 안 나고,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들은 지나고 보면 아련한 追憶으로 떠오른다”고 했는데, 實感이 난다. 그러고 보면 조금은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일까?

 

1966년 6월 지금의 부산시 양정동에 소재했던 1965년도에 준공했다는 공무원 교육원에서 기초 교육을 받고, 경남도청에서 실무 수습을 거처 5급갑류(현8급) 국비공무원(당시 봉급재원에 따라 국비, 지방비 공무원으로 나뉨)으로 陜川郡廳에 發令 받았다.

군청 전체 공무원이 4개과에 군수님 포함 대략 58명 정도인 것으로 記憶된다.

 

그 當時 합천군은 면적이 도내에서 가장 넓었다. 지금의 大邱廣域市(경산일부+달성군 포함해서 882평방키로) 보다 100여 평방키로가 더 넓은 983평방키로 이고, 인구도 19만 명(김해, 밀양 다음 3번째, 당시 울산시 인구는 7만 명 程度)이나 되었으며, 읍면수도 17개면이나 되는 큰郡 이였다.

지금은 郡 단위가 인구는 많이 줄었는데도, 직제가 확대되어 직위와 직급이 인프레 되었지만, 당시는 비중이 큰 係가 아니면 자리를 옮기지 않는 한 더 이상 승진 할 수 없는 주사보(7급) 자리가 많아 계장간의 직급이 같지 않았다.

 

사무실 환경은 여름이면, 군청이라고 해도 낮에는 전기가 안 들어오니 그 흔한 선풍기도 없고 부채로 더위를 식히는 것이 고작 이였다. 旱害나 水害때 비상근무는 방충망이 없으니까 모기에 시달리면서 (숙직실은 모기장 비치됨) 의자나 책상(나무)에서 苦痛스러운 밤을 지내야만 했다.

겨울이면, 연통 있는 煖爐(석유난로도 없었음) 1개로 넓은 사무실에 난방이라고 하니 추운 날이면 煖爐 周圍로 모이는 것이 茶飯事였다.

 

電話事情도 좋지 않아(一般電話는 사무실 당 1대뿐임) 낮에 一般電話로는 道廳과 업무 연락만 간단히 하고 장문의 전통(전언통신문)은 밤에 당직자가 警備전화로 합천경찰서와 진주경찰서(중계소 역할)를 거처 받는 것이 宿直者의 주된 일로 전통이 많을 때는 자정 가까이 까지 손가락이 아프도록 써야 했다. 다음날 해당부서에 인계하고, 이것을 17개 面에 불러 주려면 (전화성능도 좋지 않아) 목이 쉴 정도로 참으로 힘들었다.

 

面에 보내는 공문은 공문서 용지가 更紙만 되어도 좋은데, “선화지?” 라고 하는 검은 색이 나는 再生종이라 종이에 구멍 난 곳이 많아 등사기로 프린트를 하면, 글자를 볼 수 없어 일일이 전화로 다시 불러 주어야만 했다.

볼펜도 없으니 나무 책상위에는 개인별로 잉크 스텐드와 고무 깔판이 하나씩 있었다.

公文書 作成은 펜촉으로 써야 했는데 잉크 스텐드에 잉크 수분은 날아가고 항시 잉크 찌꺼기가 남아 글을 쓸 때 잉크 찌꺼기가 떨어지거나 펜촉도 갈라지는 등 글 쓰는데 애를 먹기도 했다.

 

 

요즘은 풀도 液體 등 多樣한데 그때는 조그마한 깡통에 풀을 담아 使用했다. 防腐劑가 들어 있지 않아 여름철이면 곰팡이가 썰어 사용 못하거나, 풀에 붉은 녹물이 녹아나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수분이 날아가 딱딱하게 말라붙어서 사용을 못하기도 했다.

간단한 복사는 미뇽괘지에 먹지(카본이 묻은 복사용지)를 넣어 枚數가 많으면 손이 아프도록 복사하던 일, 철끈이 없어 미뇽괘지를 찢어 말아서(노끈) 철끈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은 전자계산기가 흔하지만, 그 당시는 전부 주산으로 했고 국비재원으로 운영되던 양정계만 기계식 계산기가 있어 손으로 레바를 前後로 돌리면 땡땡 소리가 나는 묵직한 쇠뭉치 계산기가 신기했다. 그 외에도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지만, 劣惡한 與件속에서도 모두들 자기 업무에 熱心히 일한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지금과 비교하면 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첫 업무 중 가장 記憶나는 것 중 하나가 電化事業이다. 즉 電氣를 가정에 普及하는 일이다. 그 당시 전기 事情은 합천읍(합천면)에만 전기가 있고, 삼가나 초계 가야면에는 발전기나 물레방아를 이용하는 것이라 전기라 할 정도가 못 되었다. 합천읍의 電氣形便도 변전소에서 저녁 8시가 되어야 전기를 보내주고 밤 10시가 되면 전기가 가버리는데, 그나마 電壓이 낮아 전기료를 아끼기 위해 형광등을 使用할 家庭은 남보다 먼저 오후 5시경 미리 스위치를 켜 두어야 불이 들어오고 전기가 오는 8시에 켜면 좀처럼 불이오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신세대는 理解가 잘 안갈 것이지만 事實이다.

 

對象 部落은 합천읍에 隣接한 인동. 영창. 신소양. 금양. 사동. 법정부락으로 이어지는 합천군청 소재지를 벗어나는 最初의 電化事業이였다.

변전소의 管轄이 경상북도라 業務連結은 경남도 輕油 경북으로 연결되니 시일도 많이 소요 되고, 협조도 원할 하지 못하여 상당히 어려움이 많았다.

 

전기의 外線工事는 한전이 부담하는 융자사업이고, 수용가는 인입선부터 內線工事 경비를 부담해야 하는데, 융자 상환액을 包含한 電氣料가 너무 많아 (한달 평균 1,000원내외 = 당시 5급을 및 5급갑 공무원 월급이 5,000원 정도로 기억됨) 전기를 넣지 않으려는 가정이 많아 어려움이 많았지만, 기공 승낙을 받으려고 추진위원장과 함께 주야로 방문 노력한 결과 90%이상의 승낙을 받아 추진하였다. 苦生이 많은 만큼 보람도 있었다.

 

電氣料를 아끼기 위해 대다수의 家庭이 큰방과 작은방 사이, 또는 부엌과 큰방 사이의 벽을 뚫고 벽 가운데 형광등을 달아서 使用하였다. 그래도 호롱불이나 촛불. 남포불(석유사용)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았다.

迂餘曲折 끝에 공사를 끝냈고, 전기가 처음 들어오는 날은 客地에 나간 자식들은 물론 일가친척도 찾아오는 등 祝祭 雰圍氣였다.

이것을 始發로 그 후 전 부락에 전기가 들어간 것은 10년 정도 더 걸렸던 것으로 생각한다.

 

1969년 11월에 진주에 소재하는 道 事業所 主務(4급갑) 자리에 발령이나 큰 抱負를 안고 赴任을 했다.

事業所에서 일이다. 生疎한 司法業務를 보는데 소장님(이미 고인이 되셨음)은 具體的인 指示를 하면 휘말린다고 무작정 스팔타식으로 몰아 붙였다.

그렇다고 얄팍한 自尊心 때문에 직원에게 문의하기도 그렇고, 혼자서 관련 책자와 수사기록을 보고 체득한 경험은 유형별로 모두 자신감을 갖게 되자 소장에게 서운함이 오히려 고마움으로 바뀌기도 했다.

 

또 평소 직원들과는 郡 單位 이하의 행정 업무는 일부 建築 設計分野를 除外하고는 고등학교 졸업 정도 실력이면 행정직은 말할 것도 없고 기술직인 土木을 포함 직열에 관계없이 못할 것이 없다고 독려. 실천했다

 

그리고 항상 業務硏鑽을 徹底히 하여 아무리 複雜한 것이라도 밤을 새워 최단시간에 處理해야 하고, 모든 업무는 앞으로 있을 監査와 예기치 못한 刑事 문제가 대두 되어도 全然 문제점이 없도록 철저히 하게 하였다.

그 부서에서 최고 일 잘하는 사람이 되면, 이런 사람은 어떤 部署에 가도 일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에 인사 交流 時 서로 要請 하게 된다. 인사 交流 時 忌避하는 인물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强調 했다. 이러한 敎訓은 공무원 생활에 確固한 하나의 소신이었다.

 

記憶나는 事例를 하나들면, (수년 뒤의 일이다.) 團地마다 수 천만원의 補助金이 支援되는 사업이 시군 당 3~4개소씩 몇 년 지원된 일이 있었다. 이를 擔當한 직원에게 철저히 하도록 하였더니 苛酷하게 한다고 불평이 아주 많았다. 그 후 공교롭게도 이사업이 도내 전 시군이 경남 도경에 關係書類를 持參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전 시군 직원들을 모아 놓고 서류는 합천처럼 이렇게 처리해야 한다고 공개적인 稱讚을 받았다고 했다. 그 후로는 그 직원의 態度가 완전 바뀌고 업무도 熱心히 하였는데, 지금도 그 好意的인 感情은 계속 되고 있다.

업무를 잘 추진하여 稱讚을 받기는 힘들지만, 監査. 刑事 문제로부터 최소한 자기 자신을 保護하고 주위 同僚들에게 被害는 주지 않아야 한다.

 

1973년 양산군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當時 양산군에는 유난히도 大型 산불이 많았다.

장안면 (지금 부산시 기장군 관내와 울주군으로 편입된 서생면을 포함하여 양산군 산하였음) 장안사 골짜기에 난 산불이 웅상면과 정관면으로 확대되어 좀처럼 진화되지 않아 새벽까지 작업이 繼續되었고, 산불을 다 끄고 나서 보니 結婚 禮物時計가 없었다. 산불을 끌 때 흘린 것 같았다.

밤이라 어쩔 수 없었고, 장안사 절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새벽에 날이 밝자 혹시나 싶어 직원들과 함께 지난밤 산불 꺼든 곳에 찾아보았으나 險峻한 산에 찾을 수 없었다. 영영 잃어버린 것이다.

 

지휘관도 麾下 職員들에게 잘해야 군정이 發展 될 것이다

공직생활 동안 양산. 김해. 합천군을 거치면서 大略 35명이 넘는 군수님을 모셨는데 몇 분의 事例를 들어본다.

양산군 A郡守님은 時限이 정 해저 있는 民願書類를 (課長은 업자가 인사(?)를 안 한다고 결재를 안 하고), 과장이 결재를 안 했다고(민원서류 遲延處理로 담당자가 징계를 받을 수 있다고 하여도) 1개월 이상 미루어 직원에게 고통을 주는 소신 없는 군수였다. 결재서류 싸인은 굵은 싸인펜으로 姓을 漢文으로 했다.

 

김해군 B郡守님의 境遇는 急한 민원서류 경우, 과장은 부재중(미리 전화로 보고 드렸다고 함)이라 하였더니 서류 내용을 검토하시고는 시원하게 결재를 하였다. 결재서류 싸인은 그 당시 특이하게도 姓銜을 그대로 싸인했다.

이 군수님의 境遇 하나만 더 이야기 하면, 普通의 군수 들은 知事님 訪問 時 현황보고 차드 설명용 씨나리오(?)를 바쁜 室課長을 모아놓고 文脈 등을 수차례 修正하는 군수가 많은데, 이 B군수님은 보고 할 內容을 스스로 簡單히 메모하여 예산계에 차드를 만들게 하고 , 지사 방문 시 씨나리오 없이 유창하게 說明 하셨다.(설명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 하다.)

 

합천군 C군수님의 境遇 결재서류를 몇 번 檢討해 보고, 認定이 된 직원(과장 포함)은 결재서류 題目만 보고 결재를 하고, 심지어 人事文이나 실수해서는 안 되는 賞狀 案 까지 내용을 보지 않았다. 그 대신에 결재 시는 결재와 관련된 사항을 다양하게 문의하기 때문에 결재에 관련된 통계를 비롯한 모든 것을 준비 하던지, 豫想 質問에 대한 답변을 머릿속에 미리 정리해서 결재를 받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혼이 난다. 때문에 직원 모두들 緊張 속에 많은 공부를 하였다.

결재서류 싸인은 반드시 볼펜을 이용했고, 메모지도 볼펜으로 글을 쓰면 글이 잘 보이지 않는 달력 裏面紙를 활용하는 儉素한 모습을 率先하여 實踐 하였다.

 

기나긴 公職生活 동안 世人들이 말하는 出世는 못하였지만, 작은 것에 滿足하고, 幸福을 찾는 마음으로, 卽 주어진 일. 群民을 위해서 最善을 다했다는 것으로 보람을 느낀다.

공직 생활의 여러 가지 일들이 어제 일처럼 지나간다.

그동안 周圍의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큰 過誤 없이 지내온데 대해 紙面을 빌어 感謝드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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