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밤의 추억
어느 여름밤의 추억 소산/문 재학
1960년 4.19혁명이 있었던 해. 고등학교 시절 여름 방학이다. 필자의 부락에서 조금 먼 U초등학교에서 숙명여대생들의 하계 공연이 있다고 하여 부산에서 온 친구 H군(부산 동래 D고등학교를 누나 집에 있으면서 신문배달과 세탁물 운반 등을 하면서 학교를 다님) 이 주동이 되어 부락의 친구들 6명이 가기로 했다.
신작로를 따라가면 길은 좋지만 삼십 리도 넘어 지름길로 택했다. 지름길도 3개 부락과 하폭이 200m나 되는 황강을 건너야 하는데도 십오 리길은 되었다. 여대생 만나는 호기심에 아무도 주저하는 사람이 없었다.
가는 길의 밤하늘은 가끔 흰 구름이 흘러가고 있어도 총총한 별빛이 쏟아지고 있어 가는 데는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물론 플래시 같은 조명기구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시절이라 오직 밝은 별빛만 의존해야 했다.
인근 부락에 사법고등학교(지금의 교육대학 전신)에 다니는 친구를 합류 시키려다가 단념했다. 벼가 무성히 자라고 있는 2개 부락의 들길을 지내야했다.
들판이라고 해도 경지정리가 안 돼 있어 논길이 좁았다. 구수한 벼의 향기가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손수레도 없고 모든 농사일은 지개로 운반하던 시절이라 넓은 길이 있을 수 없었다.
더구나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절이라 벼를 한포기라도 더 심어야 하기에 논길은 사람이 겨우 다닐 정도로 좁을 수밖에 없었다. 무조건 북쪽으로 찾아가는 길, 가끔은 논길을 돌아가야 하기도 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한 논두렁길이다. 곳곳에 가뭄으로 용두레(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에 퍼 올리는 농기구)등이 있어 물 퍼올리는 자리가 가마니 등을 펴놓아 요철이 심해 조심조심 걸었다.
공연시간도 정확히 모르고 아무도 시계가 없어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현재 시간이 얼마인지 모르고 그냥 한시라도 빨리 가기위해 기대에 찬 발걸음을 재촉했다.
전기가 없는 부락 초가집들로부터 호롱불(호롱에 무명심지를 끼워 석유로 불을 밝힘)불빛이 희미하게 깜빡 거리는 것이 한여름 밤의 포근함을 느끼게 했다. 이따금씩 개 짖는 소리가 고요한 부락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들판을 지나자 1차 낮은 강둑이 나왔다. 인근 부락이지만 모두 초행길이다. 둑의 비탈길을 대각선으로 내려서면 바로 좁은 논두렁길이다.
간간이 삽으로 흙을 올려놓은 것을 보아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은 길이다. 길이 평탄치 않아 조심스럽게 걷지 않으면 논으로 빠지기 십상이다. 앞에 몇 사람이 조심스럽게 가고 필자가 뒤따라갔다.
필자는 사촌형님이 주는 헌 군화(軍靴)를 뒤축부분을 잘라내어 슬리퍼처럼 신고 있어 보행이 자유롭지 못했다.(이런 신을 신어도 모두 어렵게 사는 시절이다. 흉이 되지 않았다)
부산에서 온 H군은 둑 비탈길을 내려오면서(傾斜 때문에 가속도가 붙음) 필자의 등을 밀며 여기 좋은 길을 두고 좁은 논두렁길을 간다며 옆으로 뛰어들었다.
그곳은 강물이 들어오는 수로였다. 별빛뿐인 밤이라 희끄무레한 수면이 누구라도 보면 길로 착각할 수 있었다. 뛰어든 후 물이 깊은 줄 알고 헤엄을 치니 옷이 흠뻑 젖어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모두 놀라고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사실 물 깊이는 무릎위에 올 정도 1m도 안되었는데도 깊은 줄 알고 헤엄을 친 것이다. 아무리 여름 날씨라도 젖은 옷을 입고 있으니 추워서 덜덜 떨었다.
논두렁길을 100m정도 지나가 다시 모래제방을 넘어야 황강이다. 이곳 황강의 폭은 활처럼 굽어서 흐르는 곳이라 백사장을 포함 200m도 더되는 넓은 곳이다.
백사장에 들어서니 모래표면에 약간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여름 가뭄이 계속되고 있어 강물은 깊지 않았다. 강물은 비교적 따뜻해 친근감을 느껴졌다.
물에 빠진 친구는 흙탕물 옷을 씻어서 힘껏 짠 후 입었다. 강 반대편의 강둑을 넘어 다시 논길 수백 미터를 지나 학교에 도착하니 공연이 끝나가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멀리서 잠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전기가 없으니 남포등 아래 잘 보일 리 없었다. 큰 기대를 하고 왔는데 실망이 컸다.
가까이서 여대생(지금은 모두 70대중반 노인)얼굴 한번 보지 못했다. 흩어지는 사람들 속으로 다른 친구들은 놓쳐버리고 예의 부산의 H군과 같은 동네 M군과 필자와 3사람만 남았다. 모두 초등학교부터 동기동창이다.
다시 논두렁길 들판을 지나 강을 건넜다. 물에 빠진 악몽도 있었지만 논두렁길이 좋지 않아 조금 둘러가도 강둑(제방 길)로 가기로 했다.
제방길이라고 해도 풀 한포기 없는 백모래로 만든 둑 이였다. 모래 길을 걷다보니 피곤하여 쉬어 가자고 했다. 그 동안 물에 빠졌던 친구의 옷은 체온에 의해 다 말랐다.
밤이슬에 모래 표면은 식었지만 모래 속은 따뜻했다. 따뜻한 모래로 이불 삼아 옷 위로 끌어 덮기도 했다.(맑은 물에 씻긴 모래라 아주 께끗하여 미세가루는 없었다.)
별빛을 바라보며 한참을 이야기 하다가 다시 걸었다. 3사람은 한집건너 모두 이웃집에 살았다. 부락 입구에 도착하니 모두 배가 고팠다.
부락 가까이 약간 높은 곳에 약 10m정도 비탈길을 구불구불 올라가면 인근 부락사람의 참외 밭이 있다. 참외를 한 개씩 먹고 집으로 가자고 의견일치를 보고 참외 밭으로 올라가서 익은 참외를 골랐다.
어두우니까 손으로 만지서 굵은 것만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아 달콤한 향기가 풍기면 익은 것이다. 모두 양손에 한 개씩 들고 내려오면서 먹는데 부락으로 50m쯤 갔을 때 모두 먹었다.
한창 젊을 때라 참외 2개로는 안 되었다. 다시 한 개씩 더 먹자고 해서 되돌아 참외 밭으로 올라갔다.
야간에 말소리는 멀리서도 잘 들린다고 했던가 ? 참외 밭 주인집은 약150m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 우리들 움직임을 알고 주민들 몇 사람을 모았던 모양이다.
참외밭 입구에서 익은 참외를 골랐기에 수 미터 참외밭 안으로 더들어가 코로 참외향기를 맡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잡아라” 고함소리가 났다. 모두 기겁을 하고 놀라서 참외밭 위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는 참외 1~2개씩 퍼석 퍼석 박살이 나고 있었다. 이곳 참외 밭 지형은 올라가는 비탈길 좌측은 70~80도 되는 낭떠러지에 아카시아가 밀생되어 있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곳이다.
필자는 헌 군화 슬리퍼라 달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일반 신보다는 아까운 참외가 더 잘 부서지고 있었다. 꼼짝없이 잡히게 되었다.
고무신을 신은 두 친구는 재빠르게 위쪽으로 갔는데 그곳에서도 “잡아라”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다. 포위하여 잡으려고 작전을 세운 것 같았다.
필자는 달릴 수가 없어 서있으면 잡힐 것 같아 납작 엎드렸다. 이것은 독안에 든 쥐다. 좌측 급경사로 몰아가면 어디 피할 곳이 없는 곳이다.
두 친구의 필사적인 탈출 하려고 달아나기에 모두가 그곳으로 집중 되었다. 빈공간이라 생각하고 가면 그곳에도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쫓기는 사람과 쫓는 사람이 밟아대어 어둠속에 참외밭이 완전 망가지고 있었다.
그 동안 필자는 살금살금 기다시피 하여 낭떠러지 가시밭으로 내려가 숨었다. 그런데 이곳이 모기 소굴일 줄이야. 부실한 여름옷을 파고들며 팔다리, 목, 얼굴 등에 떼거리로 달라 들어 포식 잔치를 벌려도 소리가 날까봐 모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숨을 죽이면서 빨리 상황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더디어 날뛰는 두 사람을 필자가 숨어있는 가시 밭쪽으로 몰았다. 필자 있는 곳으로 올까봐 가슴이 조마조마 했지만 5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물렸다. 꼼짝없이 잡히게 된 것이다.
잡히는 것 보다는 달아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는지 무의식중에 했는지 낭떠러지 가시밭으로 M군이 먼저 뛰었다. 이어 H군이 뛰었는데 공교롭게도 M군의 몸 위에 떨어져 M군이 “아이고 나죽는다” 소리를 쳤다.
그것도 순식간 H군이 다시 점프를 하여 뛰니 3~4m 아래 벼논에 처박혔다. 다시 M군도 벼논으로 뛰어 내렸다. 벼논과 낭떠러지 사이에 폭 2~3m의 좁은 밭이 있는데, 이것을 예상하고 뛰었는지, 아니면 점프력이 좋아서 인지 밭에 떨어지지 않고 펄 논에 떨어져 다치지는 않았다.
논에 뛰어 내린 두 친구가 동내로 가는 길로 달리려는데 길에서도 사람이 “잡아라” 소리치고 있어 다시 두 사람은 반대편 산골짜기로 달아났다. 알뜰이 농사 짖은 벼논도 망가지고 있었다.
필자는 모기에 물리면서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데 웃지도 못하고 눈물이 날 지경 이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쫓는 사람들이 모두 단념하고 돌아갔다. 필자는 그때서야 집으로 돌아 왔다.
다음날 아침 일찍 M군이 찾아 와서 어제 저녁에 고무신을 잃어버렸는데 같이 찾으러 가자고 했다.
흰 고무신을 어제 밭에서 뛰어내린 아카시아 속에 있었다. 경사도 급하고 아카시아가 욱어져 올라갈 수가 없어 부근에 있는 대나무 작대기로 고무신을 끌어 내렸다.
다시 쳐다보아도 이곳은 도저히 뛰어 내릴 곳이 아니었다. 이건 완전히 죽을 각오로 뛰어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다. 다급한 나머지 어둠속에 천지도 모르고 뛰어내린 것이다.
M군도 수긍을 했다. 낮에 이것을 보았다면 만금을 주어도 뛰어내릴 수 없었다고 그래도 두 사람 모두 크게 다친데 없는 것이 다행 이였다. 부락에 돌아오니 참외밭 주인이 와 있었다.
인근 부락의 초등학교 친구 부친이 이었다. 어두워서 사람은 보이지 않아도 음성을 듣고 나중에 우리를 알았다는 것이다. 밭 수백 평을 망가트려 요즘 시세로 수백만 원은 변상해야 할 것인데도 꾸중과 주의 주는 것으로 일단락 됐다.
어제일 같이 생생한 추억. 한없이 죄송한 52년 전 추억담이다. 순박하시고 仁者하신 수박밭 주인은 벌써 고인이 되었고 그의 아들 필자의 친구도 작년에 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무신을 찾던 M군은 세상을 떠난 지 20여년이나 되었다. 모두가 덧없는 세월 속으로 사라저간 추억이다.
2012년 8월 |
![]() 논두렁 밭두렁, 오솔길 따라 별만 보고 80년 가까이 옛날의 밤길을 소산님 군화 뒷굼치 밟으며 따라 걸어 보았습니다. 옛 추억을 더듬으며... 감사한 마음으로 수박 밭주인에게 소산님 대신 인사드렸습니다. 80대 후반의 밤하늘의 별이 서울 하늘의 매연에 가려져 희미합니다. 追憶,追憶을 되뇌우며 참외밭을 서성였습니다. 감사합니다. 평안한 하루 되십시오. 鷺汀
![]() 여대생공연구경 참 걸게 하셧습니다..오가는 밤길의 험난한여정 밤길은 밝은곳은 물입니다.얕은 물에 놀란헤엄..웃음이 터짐니다..허기진배 채우려던 참외서리..요즘 젊은이들 모릅니다..아련한 추억을 한편의 소설같이 역어주시니..무더위에 지친 여름밤을 식히고도 남습니다.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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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잘못하면 변상해야 하는 판,선생님 안다치고 그냥 가만히 있었으니 다행입니다..
누구나 그 시절,,배고프던 시절입니다..ㅎㅎ
지난 추억이 그리운 시절..감회가 새롭습니다..선생님 감사 드립니다

삶의 향기가 가득히 퍼져갑니다........행복한 추억....잘 보고 갑니다....건강하십시요....






추억 회상케 해 주신글 고맙읍니다
유난히 키가 커서 2~3 살 위 형들과 친구되여 붙어다니던 나를 재생 해 봅니다

그 시대 사람 들만이 엮어낼 수 있는 추억이구요!
잘 봅니다. 늘 건강 하시길요~

무에 그리도 재미나는지 기글 거리며 개구장이 짓을 하고.. 그리운 추억이 있는 그곳 ..옛 회상의 추억을 떠 올려 보며 갑니다..
행복하세요!
님의등불 12.08.08. 11:05


그래도 정겹고 순수했던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구요. 그때로 돌아갈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덜어진 감을 주워먹고는 소금물로 입을 헹구었던 그때도 지금은 추억으로....








오십 수 성상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참외밭 서리 추억 속에 넉넉했던 인심과 관용
모두가 아름다움으로 아릿해지나이다
고운 글 잠시 서성이다 물러 가나이다
강녕하시고 향필하소서


소년원까지 갈번했던 지난 그때 그 추억 어린 서리가 미소짖게 합니다.



더운날 늘 건강 하시고
행복한 날만 되세요









감사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활기찬 나날이 되세요...

반갑습니다...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요.




마음의 여유가 있어 하늘 나라에서도 부자로 편안하게 잘사실것 같아요 주인님 감사합니다 .